- 개발자란 무엇인가
- 유머란 무엇인가
- 개발 직군에 대한 환상, 장벽, 과대평가, 선입견이 만들어내는 것
'헐 개발자세요? 개발자처럼 안 생겼어요' 라는 말을 듣고 개발자란 무엇일까 생각해보게 되었다. 필자 개인적으로는 왜 기분이 나쁘지 않았는지에 대한 이유도 찾아보았다. 결론적으로는 개발자를 바라보는 관점과 선입견이 미치는 영향까지 서술해본다. 참고로 이 글은 개발자라서 큰 무시를 당했거나 기계 부품 취급을 당한 사람들의 경험과는 다른 배경의 인사이트를 가지고 있다. 물론, 기본적인 매너는 개발자처럼 '생겼다' '안생겼다' 라는 평가적인 말 자체를 안하는 것이다.
개발자란 무엇인가.
(반드시 '추석이란 무엇인가' 칼럼의 박사님의 표정으로 읽어주길 바란다.)
그들이 생각하는 컴퓨터 프로그래머는 패션이나 뷰티에 관심 없는 너드 혹은 모범생이었을 거라 예측한다. (요즘 갓 취직하는 개발자들의 일상 출근룩이 스타일리쉬하다면 제가 그냥 늙은 것입니다. 엣헴.) 나는 그 날 한껏 힙스터처럼 옷을 입고 나갔으니, 그들 상상 속의 개발자와는 매우 상반된 이미지였을 것이다. 그 후로도, 내가 외모나 의상을 꾸미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날이면 꼭 이런 소리를 들었다. 아니, 그럼 내가 이태원 놀러갈 때 회사 출근하듯이 입고 가리?
사실 어느 전공이나 직업이든 현실과 제 3자의 상상 사이에 괴리감은 있을 것이다. 미대생이 스튜디오에서 밤을 새며 과제를 하고, 톱을 썰고, 온갖 재료를 등에 짊어지고 캠퍼스를 헤매는 모습을 보았는가? 그들에 대한 환상은 본인의 뇌 안에만 간직하는 것이 좋다. '내 상상이랑 다르네' 같은 말은 그냥 침과 함께 삼키는 것을 추천한다. 그들은 당신의 상상 따위 궁금하지도 않고 맞춰줄 필요도 없다.
하지만 나는 '헐 개발자세요? 개발자처럼 안 생겼어요' 라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개인적으로 기분이 나쁘지가 않았다. 왜 그랬을까? 단순하게 생각해보자면 이렇다.
- 예술계통 사람의 외모에 대한 기대치는 높다. 그 기대에 부합하지 못하면, 내가 센스가 없는 사람이 된다.
- 일반인들의 개발자 외모에 대한 기대치는 낮다. 따라서 개발자처럼 안 생겼다는 것은 내가 그들보다 패션 센스가 좋다는 평가이다.
- 개발자는 외부 관계자와 만나는 회의보다 앉아서 컴퓨터를 하는 시간이 길다. 그래서 외모에 큰 신경을 쓰기보다는 작업할 때 가장 편한 복장을 찾게 된다.
- '맞아 내가 주변 개발자 친구들보다는 패션 센스가 좀 있지. 나는 개발도 잘하고 외모도 잘 가꿔.' 이런 생각이었을까?
이와 반대로, 개발자같다 라는 말을 듣는 경우도 있다. 그럼 이 말을 듣는 것은 또 무슨 경우인가?
조금 더 나아가 생각했다. 개발자들 본인도 개발자를 놀리는 유머나, 개발자를 너드로 표현하는 밈에 보통 같이 공감하고 웃는다. 개발자끼리만 하는 유머여서 웃었던 걸까? 디자이너가 그런 meme을 따라했으면 기분이 나빴을까? 개발자들은 서로를 무시하는 것인가? 개발자의 고충이 안타까워서 자조적인 것이 이제는 일상이 된 것일까?
유머란 무엇인가.
나는 대학교에서 연극 전공을 하면서 코미디 수업을 들었었다. 그 때 코미디에 대한 분석을 배웠고, 그 이후로 개그를 이해하는 기준이 많이 달라졌다. 흔한 서양 코미디 연극의 특징을 기억해보았다.
- 나보다 특권을 가진 특정 계층을 우스갯거리로 만드는 행위는 재미있다.
- 현실에서는 이뤄질 수 없는 승리를 코미디로 대리만족한다. 소수자가 특권층을 조롱하는 스토리에는 희열이 있다.
- 나보다 약한 사람을 얕보는 행위도 유머로 표현된다. 하지만 이것은 약자가 강자를 이기는 반전 결말에 더 극적인 효과를 위해 고의적으로 미리 연출되기도 한다.
- 몸개그나 밀가루 폭탄 같은 요소들은 현실에서는 쉽게 마주칠 수 없는 드물고 과장된 사건의 집합이다.
다시 질문으로 돌아가본다. 개발자도 개발자를 놀리는 유머나, 개발자를 너드로 표현하는 밈에 보통 같이 공감하고 웃는다. 왜 그럴까? 개발자는 직업으로써 어떤 위치에 있는가? 다른 부서는 개발자를 어떻게 바라볼까?
- 문과 직종에 비교했을 때, 개발자는 (적어도 현재 2021년 트렌드에서는) 특권을 갖고 있는 직업군 중 하나이다.
- 비개발자가 보기에 개발자라는 직업은 높은 장벽을 가지고 있다.
- 코딩을 (잘)한다고 하면, 사람들이 선망의 눈빛으로 바라본다. 나도 아직은 그냥 월급 받는 회사원일뿐인데 말이다.
- 나도 내가 뭘 하는지 모르겠는데, 옆에서는 'oh my god, this is magic'이라고 말한다.
- 다른 부서 팀원이랑 얘기하면 자꾸 '어렵죠? 힘들죠? 일이 많죠?' 라고 한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다른 팀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물론 개발 팀이 가지는 고민이나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우를 하지 않는 회사라면, 이야기가 다르겠다.)
- 버그나 생겨서 개발자에게 수정요청을 할 때, 쩔쩔 매면서 이야기 한다.
짧게 요약하자면, 개발자가 다른 직군에 비해서 취약계층이나 약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개발자 meme에 대해서 필자는 다소 여유로울 수 있었다. 마치 백인들에 대한 유머를 PC한 백인들이 공감하고 동의하는 것과 비슷한 결론이랄까?
물론, 코딩을 이해 못하기 때문에 개발자를 기계처럼 쉽게 취급하는 사람도 있다. 나도 1년차일 때, 어떤 나이 많은 상사로부터 '아니, 이거 그냥 하루 안에 뚝딱 하면 되는 거 아냐?' 라는 소리를 들어보았다. 하지만 요즘 취업 시장에서 적극적으로 좋은 인재를 데려가고, 기술에 힘을 쏟는 스타트업이나 회사들은 개발자를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오히려 더 많이 챙겨주고 신경쓸 것이다.
개발 직군에 대한 장벽 혹은 선입견
하나의 예시로 페이스북에 다니던 친구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있다. 페이스북은 굉장히 개발자 위주의 회사라고 한다. 회사 내부 분위기나 프로덕트를 만들고 관리하는 과정에서 기술적인 혁신이 가장 중요하다. 서비스를 사용하는 커뮤니티나 윤리적인 이슈보다 기술이 더 중요할 수도 있다. 그리고 버그를 수정해야 되서 개발자에게 연락을 해야할 때, 굉장히 조심스럽게 말한다고 한다.
개발 커뮤니티 내부에서만 지내다보면 이런 경험을 많이 못해봤을 수 있다. 필자도 개발 커뮤니티나 개발자 모임에 가면 서로 겸손하고 동등한 느낌을 받는다. 연차에 상관없이 말이다. 하지만 필자는 디자이너, 컨텐츠, 마케터 등 다양한 조직과 자주 협업하고 사적으로 친해지면서 개발자와 다른 직군이 받는 취급이나 시선이 조금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예를 들어, 개발자 직원은 많지만, 디자이너나 마케터는 정직원이 거의 없는 경우도 있다.
아무래도 사회적으로 공급과 수요 때문에 이과 혹은 STEM 전공의 연봉이 높다. 더불어 더 어려운 지식과 고학력이라는 인식도 있다. 그래서 비전공자들이 가장 흔하게 하는 질문이 '비전공자여도 개발할 수 있나요' 아닐까?
이러한 인식이 초래하는 가장 큰 문제점은 회사에서 어떤 결정을 내리거나 커뮤니티에서 협업을 할 때 발생한다. 비개발자의 노고에 비해서 그들에게 돌아가는 크레딧이나 투자가 적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의 라이브러리에 대한 소개 웹사이트를 작성할 때, 디자인, 문서 작업, 기획 등의 절차가 필요하다. 디자이너와 프로젝트 매니저 같은 사람들과 함께 만들어 나간다. 그런데 그들이 개발을 모른다고 해서 무시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개발 직군뿐만 아니라 모든 직군들이 그렇다. 앞서 이야기한 미대생에 대한 선입견도 그렇다. 직업 간의 과도한 격차가 발생하면 무의식적으로 계층적인 태도가 나타날 수 있다. 덧붙이자면, 연예인이라는 직업도 그렇지 않은가? 그들도 어떻게 보면 상사로부터 평가받는 직원처럼, 관객으로부터 끊임없이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그들의 화려함 때문에 대중들은 그 너머를 보지 않는다.
재미로 시작한 주제에서 격차라는 결론으로 글을 맺어본다. 이 글을 계기로, 본인은 평소에 어떤 사람들과 지내면서 얼마나 다양한 시야를 확보하고 있는지 생각해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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